<해피엔드>, 관람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2025.05.11 🧢 쓰고 🧢 디자인 근데 왜 나만 포카 못 받았냐
SEKAI NO OWARI世界の終わり
존재를 발견하는 순간 파괴를 충동질하는 물건들이 있다. 돌이켜보면 평소에는 좋지도 싫지도 않던 교장 선생님의 차 같은 게 그렇다. 해피엔드에 등장하는 교장의 차는 하필 매끈한 머스타드빛의 스포츠카, 반골청춘 유카와 코우는 차를 말 그대로 ‘뒤집어놓는다’. 아연한 교장이 내뱉는 말은 사건 이상으로 뜻밖이다. “테러인가?”
고딩 장난에 무슨 테러? 교장의 자의식이 너무 강해서가 아니다. 영화가 그리는 근미래의 일본 사회가 그렇게 되어 있다. 지진의 공포를 매개로 국민의 안전을 지키겠다며 계엄 비슷한 긴급입법을 하는 총리가 집권한 사회. 긴장을 학습케 하는 지진 경보가 연일 울리는데 미심쩍도록 ‘오보’가 잦다. 적들이 몰려온다고 거짓으로 북을 두드리는 파수꾼처럼. 권력은 때로 이동하고 전환한다. 그러나 무탈한 권력은 암세포처럼 전 사회에 전이된다.
교장은 그 재생산되는 권력들의 말단에 있다. 스포츠카를 잃은 교장은 테러를 방지하겠다며 AI로 만든 감시 카메라를 설치한다. 복장 불량은 벌점 1점, 카메라에 뻐큐 날리기는 3점, 흡연은 10점. 일거수일투족이 벌점으로 감지되고 그 영상이 교내에 생중계되는 판옵티콘의 사회. 사실 학교 밖도 이미 그런 식이었다. 경찰은 얼굴을 찍기만 하면 신상이 쭈루룩 뽑혀 나오는 기기를 갖고 다니고, 재일교포 출신들에겐 증명서 휴대를 종용한다. 정치의 문제는 학교의 문제고, 학교의 문제는 정치의 문제였다. 원래부터 문제에 안팎이란 없는 것이다.
문제를 문제삼으면 문제아가 된다. 아마도 테크노 장르만 연구하는 듯 한 ‘음악연구동아리’에서 먹고 자는 주인공들이 그렇다. 부잣집 아들 유타는 마이너 감성을 물씬 풍기는 친구들과 친하다. 감성만 그런 게 아니라 명백한 비주류다. 흑인인 톰이 그렇고, 중국어 한 마디 못 하는데 중국계 취급을 받는 밍이 그렇고, 일본의 ‘비菲국민’ 자이니치 코우가 그렇다. 코우의 엄마는 우리 입장에서는 가슴 찢어지게도 김밥을 팔아 돈을 번다. (나머지 한 명 아타는… 키가 작다.)
순수함이라고는 없는 情
테크노에 환장해 유키마츠 유스케의 믹스셋을 틀며 노는 것이 즐겁기만 한 아이들. 안팎으로 숨쉴 틈 없는 체제는 이들의 순수마저 억압한다. 사실 해피엔드와 곧잘 비교되는 <태풍클럽>(소마이 신지)의 아이들은 순수를 체화한 중학생들이었다. 어른이 없는 무인지경의 학교에서 나체로 춤을 추고 교실과 복도를 내달려도 됐다. 실존을 고민하다 창문으로 몸을 던져도 그럭저럭 이해가 됐다.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반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주인공들은 차이가 차별을 빚어내는 태생의 정체성을 벗어날 수 없다. 졸업, 정확히는 졸업 이후라는 현실을 그 정체성이 묘하게 꼬아넣는다. 유타는 오렌지색 가방을 메고 코우는 오렌지색 헤드폰을 쓴다. 영화는 남자들 특유의 혐관우정처럼 동료의 입장은 은은하게만 보여줘 놓고, 이 두 사람이 동류同流일 수 없다는 것은 잔혹하게 강조한다. 교장의 차를 함께 망가뜨렸지만 퇴학이란 처분을 앞두고 코우와 유타가 같은 처지일 수는 없는 것이다. 유타는 코우 대신 뒤집어쓰고 싶다. 반정부 시위에 나서지만 대학 장학금이 절실한 코우는 생각에 잠기다 공연한 울분만 유타에게 토하는 날이 많아진다. 무람없이 공명하던 우정은 시대가 진동하자 불협화음을 낸다.
흔들리는 시대, 불화하는 소리
그래서 해피엔드는 소리를 가지고 논다. 특히 소리와 실질의 불일치를 강조하면서. 그놈의 섬뜩한 지진 경보는 종종 거짓이다. 유타가 애용하는 블루투스 스피커도 훌륭한 도구가 된다. 학교에 몰래 들어가려고 고양이 소리로 경비원을 속이고, 압수당한 서브우퍼를 빼내기 위해 지진 경보를 틀어 선생님을 낚는다. 교내 방송 스피커랑 울림통이 같나, 싶은 짐작은… 넘어가자. 시각을 동반하지 않은 음성은 불안을 자극하기 마련 아니겠는가.
영화는 극단적 롱샷과 풀샷을 이야기의 비트가 바뀌는 전환점으로 삼는다. 이런 장면에서 100%에 가깝게 단 두 사람만이 등장하는데 대부분 ‘더빙’을 동반한다. 두 사람의 대화를 잘 들어보면 사실 다른 아이들이 성대모사를 하며 장난치고 있는 것이다. 초반엔 굉장히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런데 중후반부로 갈 수록 -특히 톰이 코우에게 미국으로 떠난다는 말을 꺼낼 때- 시각적 불화가 너무 분명해져 더빙하는 아이들이 머쓱해지기까지 한다.
영화에서 소리는, 역설적이게도 지진을 가장 상세히 묘사하는 장면에서 사라진다. 보기에 따라 그럴듯 한 재난같기도, 권력자들이 겁을 주는 것 치고는 별 것 아닌 듯 보이기도 한다. 그 자신이 정치적 성향을 숨기지 않는 네오 소라 감독의 의도는 짐작이 간다. 다만 일본인이 아닌 우리는 각자 판단해볼 일이다. 그 판단이 이 영화를 평가하는 주요한 갈림길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권력은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묘사되지는 않는다. 여기 나오는 어른들, 선생부터 교장까지 되게 유치하다. 그럴 만도 하다. 억압의 논리는 대개 정교하지 못하다. 논리로 정당화하지 못하고 관성에 의존하는 체제는 지속하기 어렵다. 감독이 그것까지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음악 위 상처는 청춘의 징표
청춘의 불안은 음악으로 도망한다. 테크노 클럽에 입장하는 것이 첫 장면의 목표이거니와 유타가 주말 알바로 취직한 악기 판매점은 마지막 해방구로 묘사된다. 글로 설명하느니 직접 보며 듣기를 권한다. 음악이란 세련된 곳에서는 빛으로 명멸하지만, 나약한 이들에게는 눈을 감아도 단단한 성벽이 된다. 음악이 지닌 비교우위가 그렇다. 그것을 해피엔드보다 즐겁게 묘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배틀로얄과 태풍클럽 사이
영화는 날카롭게 청춘과 우정의 흔들림을 묘사한다. 진동은 지진 때문에, 우퍼 때문에, 다리를 떨기 때문에, 아니면 그냥 우리 자신이 흔들리기 때문에 일어난다. 진동-재난에 공명-반응하는 두 소년의 마음이 그렇게 보인다. CCTV처럼 정적인 화면, 낮은 채도의 색감을 사용한 것도 의도적이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학교의 모습은 현실과의 접점이 된다. 감각을 극대화한 일본판 파수꾼이랄까. 누가 박정민 쪽인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눈치챌 것이다.